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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키미소의 사계 · 일본 도쿄 · 츠키미소

물 얼룩이 번지기 전에

도쿄 근교의 츠키미소는 키무라 치즈루가 남편 슈이치와 함께 장만한 오래된 집입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이층을 셋방으로 꾸며 일자리를 잃었거나 이혼을 겪은 이, 장인의 길을 걷거나 바다를 건너온 이들을 품어왔습니다. 도서 장정가 미즈노 소라는 2025년 가을에 입주해 구급대원 타카하시 케이와 이웃에서 서로를 약속하는 사이로 발전했습니다. 누수와 비바람 속의 협동, 여름 끝뜰에서의 식사를 통해 각자의 일로 바빴던 이들은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더위가 가라앉고 꽃꽂이 강좌가 열리며 주자는 학교로 돌아가고, 야간 근무와 마감은 계속됩니다. 집의 내일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이미 쉽게 떠날 수 없는 나날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소설 읽기

이야기의 주인공

미즈노 소라

책을 사람 곁에 오래 머무는 물건으로 만들어내며, 삶을 혼자서만 짊어지지 않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다.

타카하시 케이

늘 타인의 안전부터 확인하던 응급구조사, 츠키미소에서 자신의 피로 또한 관계 속에 털어놓는 법을 배웠다.

목차

서장: 나이테와 녹빛의 40년

츠키미소는 첫눈에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건물이 아니었다.

게이오선 지선 철도에서 걸어서 10분 남짓한 비탈길 아래에 자리 잡은 이 건물은 쇼와 57년(1982년)에 지어졌다. 회록색 시멘트 미장 마감과 짙은 갈색 삼나무 골조로 된 2층 목조 혼합 건축물이었고 지붕에는 옛 시절 흔히 쓰이던 짙은 푸른색 물결 기와가 얹혀 있었으며 뒤뜰에는 여름과 가을의 길목에서 무성하게 자라난 들박하와 달맞이꽃 무리가 바짝 붙어 있었다.

40년 전 서른 살의 키무라 치즈루와 남편 키무라 유스케가 시부모에게서 이 낡은 집을 물려받았을 때 도쿄의 버블 경제는 끓는 물처럼 부글거리고 있었다. 주변의 논밭과 과수원은 불과 몇 년 사이에 불도저에 밀려 평탄화되었고 타일을 붙인 5층 연립주택들이 우후죽순 솟아올랐다. 당시 유스케는 사립고등학교 행정실에서 일하며 과묵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녔는데 퇴근 후 유일한 낙은 1층의 스무 다다미 크기 공용 주방 겸 식당에서 무쇠 냄비를 올려두고 뭉근한 불로 가쓰오부시 육수를 우리거나 손글씨 조리법을 뒤적이는 것이었다. 슬하에 자식이 없던 부부였기에 유스케는 아내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치즈루, 집이 너무 크면 사람 발길이 닿지 않아 대들보가 쉬이 썩는 법이야. 2층을 여섯 방, 1층을 네 방으로 나누어 도쿄에 갓 상경해 주머니 사정이 빠듯한 젊은이들에게 세를 놓읍시다. 방세를 헐하게 받고 함께 청소하며 서로 돕는다면 이곳은 비바람을 막아줄 보금자리가 될 테니까.」

그것은 선의와 묵시적 신뢰로 가꾸어낸 시절이었다. 치즈루는 남편의 철학을 신봉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정은 메마른 종이 위의 계약서보다 훨씬 따스하고 견고하다는 믿음이었다. 세입자가 방에 열쇠를 두고 나오면 슬리퍼를 끌고 내려와 문을 열어주었고 월말에 월세를 맞추지 못한 청년이 있으면 유스케는 빙그레 웃으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치쿠젠니를 한 대접 퍼 담아 어깨를 두드려주며 「다음 달 월급 받으면 그때 주게」라고 말했다.

그러나 시간은 티끌만 한 자비도 베풀지 않는 가혹한 화학 용제였다.

12년 전 늦가을 유스케는 급성 심근경색으로 주방 바닥에 쓰러졌고 손에는 간을 보던 대나무 숟가락이 꼭 쥐여 있었다. 남편을 떠나보낸 치즈루는 틈을 노린 부동산 중개업자들의 매각 제안을 모조리 물리치고 퇴행성 관절염을 앓기 시작한 두 무릎으로 이 거대하고 지친 피난처를 홀로 짊어졌다. 방세를 단 한 번도 올리지 않았고 기한이 지난 임대차 계약서를 고쳐 쓰지도 않았다. 수도꼭지가 새면 골목 어귀 철물점에 고무 패킹 교체를 부탁했고 태풍에 용마루 기와가 날아가면 오랜 세입자 노구치 오사무에게 사다리를 부탁해 뚝딱뚝딱 손질했다.

세입자들의 눈에 츠키미소는 시간이 멈춘 듯 평온한 외딴섬이었으니 값싸고 푸근하며 쇼와 시대의 간장과 목재 냄새를 그윽이 풍겼다. 그러나 오직 치즈루만이 깊은 밤 제 무릎뼈가 부딪치며 내는 파열음을 들을 때 천장의 누런 물 얼룩을 응시하며 숨 막히는 답답함에 짓눌리곤 했다. 그녀는 건물의 모든 노후화를 집주인으로서의 태만으로 자책했고 온갖 억지 유지를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한 표정 뒤에 감추어두었다.

마침내 2026년 한여름, 선의와 미루기, 인내와 비밀로 얽어맨 이 삶의 용기는 보이지 않는 벽면 깊은 곳에서 강관이 파열하기 직전의 날카로운 신음성을 토해내기에 이르렀다.

제1장: 보이지 않는 침식

오후 3시의 햇살은 조후 옛 골목의 아스팔트 길을 말랑하게 달구어놓았고 공기 중에는 타이어와 흙먼지가 내뿜는 매캐한 냄새가 진동했다. 55세의 노구치 오사무는 14시간에 걸친 야간 택시 교대근무를 갓 마치고 충혈된 눈으로 낡은 면 작업바지를 입은 채 츠키미소 뒷마당 시멘트 개수대 곁에 쭈그려 앉아 수건으로 백미러를 닦고 있었다. 등 뒤에서 나막신이 바닥을 끄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억지로 억누른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오사무가 고개를 돌리자 집주인 키무라 치즈루가 붉은 벽돌 담벼락을 짚은 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짓하고 있었다. 「오사무 씨…… 주방으로 잠깐 들어와 줄 수 있겠소? 싱크대 밑 바닥이 밟으면 푹신거리는 게 영 이상해서 말이오.」

오사무는 걸레를 내려놓고 1층 주방으로 들어섰다. 츠키미소의 공용 주방은 30년 전 백색 유약 타일과 스테인리스 긴 조리대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고 오후의 비스듬한 햇살이 방충망을 통해 싱크대 아래 나무 수납장 문짝을 비추고 있었다. 오사무가 쭈그려 앉아 문을 열자 녹과 묵은 하수구 기름때, 썩은 톱밥이 뒤섞인 퀴퀴한 곰팡내거 확 풍겼다. 택시에 늘 두던 손전등을 꺼내 안쪽을 비추어보니 온냉수가 교차하는 아연도금 강관 표면에는 종양처럼 부풀어 오른 붉은 갈색 녹반이 다닥다닥 돋아나 있었고 엘보 이음새에서 미세한 물안개가 쉭쉭 뿜어져 나왔으며 바닥 합판은 오수를 머금을 대로 머금어 손만 대도 부스러지는 검은 진흙으로 변해 있었다.

「이건 고무 패킹이나 갈아 끼워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치즈루 댁.」 오사무는 굳은살 박인 검지로 배관 표면을 만져보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원줄기 배관은 적어도 35년은 묵었으니 안쪽 벽이 다 삭아버렸어요. 물이 벽 속 배관을 타고 2층 마루와 배관 통로로 스며들고 있습니다. 제대로 고치려면 벽을 반쯤 헐어내고 배관을 전면 재시공해야 합니다.」

치즈루는 그의 등 뒤에 서서 짙은 남색 앞치마를 두 손으로 바짝 쥐어짰고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도드라졌다. 노인의 눈동자에 애원에 가까운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벽을 헐다니…… 돈이 얼마나 들겠소? 공사 소음도 엄청날 텐데 아이들이 다 방에서 생활하고 있잖소…… 오사무 씨, 예전처럼 방수 테이프와 밴드로 어떻게든 꽁꽁 동여매 줄 순 없겠소? 제발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말아 주시오. 다들 제각기 먹고살기 팍팍할 텐데.」

오사무는 가늘게 떨리는 치즈루의 야윈 손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압력솥 뚜껑을 용접해 버리면 나중에 더 무섭게 폭발할 뿐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불단 위 유스케 영정 사진의 온화한 미소와 10년 전 이혼하고 낙담하여 방세를 못 내던 시절 치즈루가 내어주었던 따뜻한 국 한 그릇이 떠올라 끝내 경고를 삼켜버렸다. 「……우선 금속 방수 보수 테이프로 틀어막아 보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시간 끌기에 불과해요, 치즈루 댁. 길어야 한 달입니다.」

오사무는 오전 내내 누수 부위를 테플론 테이프와 납 봉인 실리콘으로 두껍게 감싸는 데 바쳤다. 겉보기에 물기는 멎었고 주방 바닥은 다시 보송보송해졌다. 그러나 정보의 불균형은 맑은 물에 떨어진 먹물 한 방울처럼 츠키미소에 조용히 번져나갔다. 치즈루는 배관이 썩어 문드러진 비밀을 틀어쥔 채 입을 굳게 닫았고 오사무는 바닥 기초가 갉아 먹히고 있음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 가슴속에 무거운 바위를 얹고 살아가게 되었다.

8월 4일 해질녘 오사무는 조후역 북쪽 출구에서 택시 승차 대기 중이었다. 동네에서 30년간 부동산 중개업을 해온 오랜 단골 시마다 가 뒷좌석 문을 열고 올랐다. 차가 구 고슈가도를 따라 달릴 때 시마다는 담배를 건네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어이, 오사무, 자네 아직 키무라네 츠키미소에 살지? 치즈루 누님이 요새 대형 건설사에 통매각 시세를 은밀히 알아보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던데. 그 일대 재개발 묶인다는 말이 파다하잖아. 오래된 집이라 대지가 넓으니 지금 털어내면 노후 자금 두둑이 챙길 텐데 말이야.」

오사무가 운전대를 쥔 손에 돌연 힘이 들어가며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굳었다. 「……시마다 씨,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들으셨소? 치즈루 댁은 그 집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양반입니다.」

「이봐, 나이 들고 몸 성치 않으면 세입자들을 언제까지고 거둘 수 있겠나?」 시마다는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어쨌든 상점가에 소문이 쫙 퍼졌으니 자네도 미리 눈치껏 살피게나. 어느 날 갑자기 퇴거 통지서 붙어 낭패 보지 말고.」

확인되지 않은 이 한마디 뜬소문은 독침처럼 오사무의 심장에 깊숙이 박혔다.

이튿날인 8월 5일 정오, 상점가 『후지와라 도시락』의 스물일곱 살 딸 후지와라 리코가 보온 가방을 들고 츠키미소로 배달을 왔다. 어릴 적부터 치즈루를 보며 자란 리코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치즈루가 신발장 난간을 짚은 채 힘겹게 허리를 굽혀 신발을 벗으려는 모습을 목격했다. 노인의 오른쪽 무릎은 잘 익은 무처럼 퉁퉁 부어올라 얇은 면바지 위로도 뒤틀린 윤곽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치즈루 아주머니! 다리가 어쩌다 이렇게 부었어요?」 리코는 도시락통을 황급히 내려놓고 부축하려 손을 뻗었다.

치즈루는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화들짝 손을 빼내더니 억지로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오랜 지병인 관절염일 뿐이란다. 리코, 오늘 고등어 도시락 고맙다. 얼른 돈 챙겨서 가게로 돌아가렴. 아버지가 기다리시겠다.」

리코는 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치즈루가 쥐여준 잔돈을 만지작거리며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치즈루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고 오사무 아저씨는 요새 안색이 굳어 있었으니 츠키미소는 겉으로는 고요해 보이나 수면 아래서 소리 없이 가라앉는 난파선 같았다.

위기는 어둠 속에서 속도를 내며 충돌했다. 8월 6일 심야 치즈루의 무릎 통증이 극심하게 엄습하며 식은땀이 이부자리를 흠뻑 적셨다. 노인은 다다미 위에 웅크린 채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더듬어 2층 201호에 사는 응급구조사 타카하시 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은 여섯 번 울렸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 시각 타카하시 케이는 두꺼운 방호복을 입고 조후시의 3중 추돌 대형 교통사고 현장에서 절단기를 들고 인명 구조를 벌이고 있었다. 부상자의 동맥혈이 구급 장갑을 붉게 적셨고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유족들의 처절한 비명이 온 감각을 짓눌렀다. 아침 7시 교대 후 숙소 탈의실에 들어와서야 미수신 전화를 확인했다. 충혈된 눈가를 비비며 공용 전기세 분담을 물으려나 보다 지레짐작한 그는 「밤새 너무 지쳤으니 저녁에 퇴근하고 들러 인사하자」고 넘긴 채 당직 침대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다. 구조 신호는 피로와 침묵 속에서 그렇게 엇갈렸다.

8월 7일 오후 츠키미소의 잠복해 있던 공용 갈등이 처음으로 수면 위로 불거져 나왔다.

도호가쿠엔 음악연구과 2학년에 재학 중인 스물네 살 청년 오가타 타이가는 방이 비좁아 베이스 트롬본을 안고 1층 거실로 내려와 현대 앙상블 연습을 시작했다. 낮고 거칠며 쇳소리가 섞인 긴 음률이 텅 빈 복도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잠에서 깨어 출차를 준비하려 내려오던 노구치 오사무는 이 귀를 찌르는 금관악기 소리에 관자놀이가 터질 듯 요동쳤다. 낮밤이 뒤바뀐 만성 피로와 배관 침식에 대한 불안, 건물 매각 소문에 짓눌린 짜증이 일순간 폭발했다. 오사무는 거실 미닫이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유성 매직으로 「주간 공용 공간 관악기 연주 금지, 야간 근무자 수면 보장 요망」이라 갈겨쓴 두꺼운 마분지를 찻상 위에 탁 내리쳤다.

「타이가! 츠키미소가 너 혼자 쓰는 연습실인 줄 알아!」 오사무의 쉰 목소리가 서슬 퍼렇게 울렸다.

타이가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고 트롬본 벨 끝이 테이블 모서리에 부딪힐 뻔했다. 청년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채 떨리는 손으로 악보를 구기며 억울함과 당혹감에 눈시울을 붉혔다. 「죄, 죄송해요, 오사무 아저씨…… 다들 이 시간에는 외출하신 줄 알고…… 다음 주에 실내악 과제를 제출해야 해서……」

「외출? 야간 근무 뛰는 사람은 사람도 아니라는 거냐?」 오사무는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입주민 전체의 상의 없이 오사무가 독단적으로 게시판에 붙여둔 이 쪽지는 날카로운 흉터처럼 츠키미소가 오랜 세월 유지해 온 「상부상조」의 거짓된 평화를 단숨에 깨뜨려버렸다.

제2장: 각자의 암초와 시차

갈등은 결코 단선적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고 츠키미소의 열 개나 되는 서로 다른 영혼 사이에서 팽팽하게 얽힌 그물망으로 짜여나갔다.

8월 8일 이른 아침, 보험 설계사 키류 에미는 정장 재킷을 걸치며 현관에서 집배원이 건넨 묵직한 등기 우편물을 수령했다. 수취인란에는 ‘사에키 나나’라고 적혀 있었고, 발송처는 나가노현의 전원 기숙형 공립 기술고등학교로, 전액 장학금을 지원하는 외딴 학교였다. 에미의 손가락이 순간 굳어지며 우편물 모서리가 푹 찌그러졌다.

희미한 새벽빛이 드는 현관에 선 에미의 심장은 커다란 망치로 얻어맞은 듯 쿵 내려앉았다. 3년 전 알코올에 찌들어 걸핏하면 가구를 부수던 전남편의 집을 나와 나나를 데리고 완전히 돌아선 뒤, 에미는 이를 악물고 쥐꼬리만 한 보험 수수료로 딸을 키워왔다. 나나를 곁에 두고 도쿄의 대학에 진학시켜 실패한 과거를 딛고 어머니로서의 자존심을 증명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열여섯 살 난 딸은 어미 모르게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기숙학교에 지원했던 것이다. 에미는 우편물을 뜯지 않은 채 신발장 가장 밑바닥 구석에 처박아 넣었다.

이튿날 8월 9일 새벽 1시, 2층 203호에 사는 서른다섯 살 대만 여성 린메이링은 노트북을 안고 거실 긴 탁자에 앉아 있었다. 글로벌 헬스케어 테크 기업의 마케팅 기획자인 메이링 앞에는 아직 완성하지 못한 3분기 아시아태평양 마케팅 제안서가 펼쳐져 있었고, 가스레인지 위에는 연일 이어진 야근으로 인한 위통을 달래려 당귀와 구기자의 달콤한 향이 감도는 약선 갈비탕이 약불에서 은근히 끓고 있었다.

오사무에게 호된 꾸지람을 듣고 방에서 헤드폰을 낀 채 곡을 쓰던 타이가가 문을 박차고 나왔다.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운 얼굴에는 억눌린 분노가 가득했다. 「메이링 누나…… 지금 새벽 한 시예요. 이 집 방음이 얼마나 엉망인지 몰라요? 주전자가 저렇게 비명을 지르면 2층 사람들 다 깨잖아요!」

메이링은 허겁지겁 가스를 끄고 대만 억양이 섞인 일본어로 연신 사과했다. 「미안해 타이가 군! 내가 정말 부주의했어…… 당장 방으로 들어갈게!」

타이가는 허겁지겁 노트북을 챙기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요…… 어차피 이 집구석에서 편히 잘 수 있는 놈은 애초에 없으니까.」

메이링은 203호로 돌아와 문을 닫고 문짝에 등을 기댄 채 바닥으로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노트북 화면에는 30분 전 어머니가 보낸 라인 메시지가 깜빡이고 있었다. 【메이링아, 다음 달부터 할머니 간병비가 5천 대만 달러 오른단다. 남동생네는 주택담보대출 갚느라 여유가 없다는데 네가 먼저 부쳐줄 수 있겠니?】 메이링은 창밖 칠흑 같은 도쿄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끝내 말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겉보기엔 다정해 보이는 이 오래된 집에서, 고향을 그리는 갈비탕 한 그릇조차 이웃의 평온을 해치는 죄가 되어버렸다.

8월 10일, 205호에 사는 한국인 프리랜서 번역가 박준호는 힘겨운 결정을 내렸다. 게임 유통사의 착취에 가까운 저가 현지화 계약에 맞닥뜨린 이 서른 살의 온순하고 다소 유약한 청년은 마침내 반송 버튼을 눌러, “사흘 안에 5만 자를 번역하되 원고료는 절반만 지급한다”는 무리한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다음 달 생활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컵라면 용기가 널브러진 다다미에 앉아 통장의 8만 엔 남짓한 잔고를 바라보던 준호의 시선은 책상 한쪽에 놓인 서울의 헤드헌팅 회사 우편물로 향했다. 대형 모바일 게임사의 해외 마케팅 자리로 연봉은 지금의 세 배였지만, 9월 중순까지 일본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서울로 복귀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8월 11일 집배원이 발신인 회사명이 적히지 않은 큼직한 흰 봉투를 배달했다. 치즈루는 입주민들의 눈을 피해 관리실 문을 걸어 잠그고 떨리는 편지 칼로 봉투를 찢었다. 그것은 그녀가 민간 건축사무소에 의뢰했던 『츠키미소 건물 내진 및 상하수도 전면 개보수 개략 견적 평가서』였다. 마지막 장의 총합계 금액이 굵은 활자로 한가운데 박혀 있었다. 【공사 개산 비용: 1,860만 엔(세금 포함)】.

치즈루의 시야가 순식간에 흐려졌다. 쥐꼬리만 한 국민연금에 매달 자잘한 수리비를 제하고 나면 고작 몇만 엔 남짓 떨어지는 방세 수입으로는 삼십 년 동안 굶어가며 모아도 이 천문학적인 금액의 끄트머리조차 마련할 수 없었다. 평가서 하단에는 싸늘한 각주가 덧붙어 있었다. 「본 건축물은 축조된 지 44년이 경과하여 6개월 이내에 배관 전면 교체 및 구조 보강을 시행하지 않을 경우 주 간선 배관의 대규모 파열로 인한 기초 지반 붕괴 위험이 상존하므로 해체 처분을 권고함.」

치즈루는 떨리는 두 손으로 견적서를 반으로 접고 또 접은 뒤 세상을 떠난 남편 유스케가 생전에 가장 아끼던 손글씨 『사계절 육수 조리 수첩』 사이에 끼워 넣고 불단 맨 아랫단의 나무함 깊숙이 파묻어두었다.

같은 시각 상점가의 후지와라 도시락 가게에서는 리코의 아버지 후지와라 시게루가 심한 기침을 토해내며 튀김 솥에서 거대한 돈가스 소쿠리를 건져 올리고 있었다. 노인은 얼굴의 기름땀을 훔치며 도시락을 포장하던 리코에게 고함을 쳤다. 「리코! 다음 달부터 배달 다 치우고 너 종일 가게에 붙어서 밑준비나 해! 츠키미소 그까짓 곳에 도시락 몇 통 날라봐야 얼마나 번다고 그래? 너 벌써 스물일곱이야, 이 가게 나중에 네가 물려받아야 한다는 거 몰라?」 리코는 고개를 떨군 채 랩을 뜯어냈고 찢어지는 비명이 요란했다. 말대꾸하지 않았으나 눈물이 스테인리스 조리대 위로 뚝뚝 떨어졌다.

한편 201호에 머물던 응급구조사 타카하시 케이는 8월 13일 아침 전철을 타고 스미다구 무코지마의 본가로 향했다. 용접 불꽃 찌꺼기 냄새가 밴 철공소 살림방으로 들어서자 아버지 타카하시 이사무가 산소 호흡관을 꽂은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철판처럼 우람하던 어깨는 뼈대만 앙상히 남아 있었다. 「케이냐……」 예순셋의 늙은 용접공은 사포 같은 쉰 목소리를 냈다. 「그놈의 구급차 밤샘은 언제까지 할 셈이냐? 애비처럼 몸을 쇠막대기로 착각하지 마라. 늙어서 숨 한 모금 편히 못 쉰단다. 주간으로 돌리고 착한 처자 만나 살림 차려.」 케이는 아버지의 등을 두드리며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 어릴 적 배운 생존법이란 피로를 남에게 절대 털어놓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한 홀로 재앙을 막아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등 뒤에는 이미 깊은 균열이 새겨져 있었다.

제3장: 각자 쌓아 올린 높은 벽

8월 중순의 오봉 연휴, 도쿄 전역은 무덥고 텁텁한 진공 상태 같은 적막에 휩싸였다.

8월 14일 오가타 타이가는 삿포로 교향악단 청년 아카데미로부터 오디션 초청장을 받았다. 더없이 값진 프로 데뷔의 기회였으나 서신 말미에는 선발자가 9월 중순부터 반년간 홋카이도에 상주하며 순회공연 연습에 참여해야 한다고 못 박혀 있었다. 타이가는 봉투를 쥔 채 뒷마당 돌계단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삿포로로 떠난다면 방을 빼야 했고, 지난 2년간 가족처럼 쌓아 올린 삶의 지지대가 끊어질 터였다. 룸메이트들에게 털어놓지 못한 채 동기에게 「아직 고민 중」이라는 메시지만 남겼다.

8월 15일 아침, 노구치 오사무는 현관 공용 우편함에서 고급스러운 무광 검정 명함을 발견했다. 『미츠바 부동산 개발 주식회사·도시재생기획부 주임』이라 박힌 명함은 『키무라 치즈루 귀하』의 등기우편 수령 안내서 틈에 끼워져 있었다. 금박 활자를 응시하는 오사무의 뇌리에 중개인 시마다의 말이 메아리쳤다. 명함을 빼지 않고 꽂아둔 채 배신감에 휩싸였다. 「치즈루 댁, 정말 뒤로 손을 쓰고 계셨군…… 40년 정을 나눴다더니 우리 같은 늙은 세입자는 언제든 치워버릴 짐짝에 불과했단 말인가?」

8월 16일 오후 타이베이에서 어머니가 가벼운 뇌졸중으로 응급실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메이링은 203호에서 남동생과 대만어로 격렬한 전화 말다툼을 벌였다. 「왜 이제야 말해?! 그냥 어지럼증이라며?!…… 비행기표? 도쿄에서 타이베이 가는 게 지하철 타듯 아무 때나 되는 줄 알아?! 나 지금 클라이언트 발표회 두 개나 남았단 말이야!」 전화기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통화는 끊겼다. 옆방 204호의 사에키 나나는 복도 벽에 기대 보리차를 마시며 메이링의 흐느낌을 고스란히 들었다. 문을 두드리지 않은 채 눈빛만 어두워졌다. 어른들은 늘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는 척 굴다가 전화통을 붙잡고 무너져버린다.

8월 17일 오후 치즈루는 갓 썬 수박 한 접시를 들고 205호 박준호의 방문을 두드렸다. 노인은 접이식 의자에 어색하게 걸터앉아 품속에서 일본어와 영어가 병기된 상업 개발 의향서 초안을 꺼내놓았다. 부동산 회사가 며칠 전 우편함에 쑤셔 넣고 간 것이었다. 「준호 씨…… 책도 많이 읽고 외국어도 밝잖소. 여기 적힌 『신탁수익권 이전』이니 『현 거주자 퇴거 보상 협의 기간』이니 하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 좀 봐줄 수 있겠소? 내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말이오.」

준호는 안경을 고쳐 쓰며 빽빽한 법률 조항들을 훑어내려 갔고 심장이 요동쳤다. 노후 세입자들에게 극히 불리한 약탈적 통매각 협약서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주름진 얼굴에 공포와 수치심을 담은 치즈루의 눈망울을 마주하자 턱밑까지 차오른 캐물음을 삼켜버렸다. 「치즈루 아주머니, 이건 그저 사전 의향서일 뿐 법적 구속력은 없습니다. 다만 건물을 넘기실 뜻이 없다면…… 절대로 여기에 도장을 찍으시면 안 됩니다.」

「안 팔아요…… 내가 어떻게 팔겠소……」 치즈루는 준호에게 하듯, 스스로에게 되뇌듯 중얼거렸다. 「유스케가 내게 맡긴 집인데, 끝까지 지켜내야지……」 준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츠키미소에서 집주인의 속내를 엿본 유일한 이가 되었으나 치즈루의 신뢰를 저버릴 수도, 길바닥에 나앉을지 모른다는 제 안의 공포를 잠재울 수도 없었다.

8월 18일 키류 에미는 까다로운 고객의 의료보험 증권을 재검토하느라 나나와 개학 용품을 함께 사러 가기로 한 약속을 어겼다. 나나는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으며 홀로 츠키미소로 걸어왔고 온몸이 흠뻑 젖어 가방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24시간 당직을 마치고 들어서던 타카하시 케이가 파랗게 질린 입술의 소녀를 보고 구급 가방에서 마른 수건을 꺼내 건넸다. 「나나? 왜 이 꼴이야? 에미 누나는?」 나나는 흠칫 놀란 짐승처럼 케이의 손을 뿌리치며 반항심 어린 눈빛을 쏘아붙였다. 「신경 끄세요! 어차피 다들 나보다 중요한 큰일로 바쁘시잖아요!」 소녀는 가방을 안고 쿵쾅거리며 2층으로 뛰어 올라가 문을 쾅 닫았다. 케이는 멍하니 빈 손바닥을 바라보며 씁쓸함을 삼켰다.

8월 19일 오사무는 끝내 참지 못했다. 공구함을 들고 치즈루를 찾아가 주방 벽판을 뜯어내고 배관 부식 실태를 확인해야 한다고 다그쳤다. 「치즈루 댁, 이러다 배관이 통째로 터지면 건물 전선과 골조가 침수되어 합선이 납니다!」 그러나 치즈루는 배전함 앞을 필사적으로 가로막으며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오사무 씨, 건축사무소에서 벽을 트는 순간 내진 기준을 재검사받아야 한다고 했소! 공사비를 감당하지 못하면 시청에서 사용 중지 명령을 내릴 거요! 조금만 더…… 방법을 찾아볼 테니 기다려주시오……」

오사무는 10년간 자신을 보살펴준 늙은 집주인을 뚫어지게 응시했고 눈동자의 온기는 차갑게 식어갔다. 공구함을 덜컥 닫은 그의 목소리는 무서울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좋습니다. 절 못 믿으시겠다면 저도 허락 없이 이 집에 못 하나 박지 않겠습니다. 언젠가 물난리가 터져도 누구 탓도 하지 마십시오.」 신뢰의 기둥은 이로써 모질게 잘려 나갔다.

제4장: 미세한 기울기

미세한 균열은 삽시간에 황당한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8월 20일 정오, 후지와라 리코는 가게에서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은 탓에 넋이 나간 채 츠키미소로 도시락을 배달하러 오다가 무려 40분이나 늦고 말았다. 1층에서 오후 아르바이트 출근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타이가는 도시락이 도착하자 자신이 대신 받아 다른 입주자들에게 전해주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서두르던 와중에 타이가는 202호 에미 모녀가 주문한 저칼로리 닭고기 도시락을 오랫동안 비어 있던 102호 문 앞에 잘못 두고 말았다. 그날 저녁 파김치가 되어 귀가한 에미는 텅 빈 현관과 나나의 냉담한 표정을 마주하고 리코가 배달을 빠뜨린 것으로 오해했다. 리코는 전화기 너머로 서러움에 울먹였고 타이가는 곁에서 연신 머리를 숙였으나, 에미는 “됐어요, 앞으로 저녁은 알아서 해결할게요”라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잘못 배달된 도시락 하나가 상점가와 츠키미소 사이에 수년간 이어져 온 따스한 유대를 거칠게 찢어놓았다.

이튿날인 8월 21일, 노구치 오사무는 입주민 열 명이 모인 「월견장 생활 연락방」에서 몇 주간의 침묵을 깨고 장문의 첫 메시지를 올렸다.

【@전체 거주자 여러분, 츠키미소 건물의 노후화와 급배수 배관에 중대한 안전상의 결함이 드러났으며, 외부에서도 건물의 처분에 관한 불온한 소문이 무성합니다. 이번 일요일까지 전체 입주자 총회를 소집하여 집주인 키무라 치즈루 씨께서 현재 상태와 향후 대책을 투명하게 밝혀주실 것을 제안합니다.】

메시지가 전송된 뒤 대화방은 몇 시간 동안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고민이 깊은 메이링은 섣불리 의견을 내지 못했고, 준호는 식은땀이 맺힌 손으로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 방금 응급 구조를 마친 케이는 화면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과 함께 미간을 찌푸렸다. 거실에 홀로 앉아 있던 치즈루는 최후통첩이나 다름없는 오사무의 글을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통증에 손가락이 떨려 아무런 답장도 적지 못했다. 침묵은 저마다의 시선으로 해석되었다. 오사무는 치즈루가 매각과 은폐를 인정한 것이라 여겼고, 젊은이들은 오랜 입주민이 세력 다툼을 벌인다고 보았으며, 에미는 평온했던 안식처가 끝없는 분쟁의 늪으로 전락하리라 직감했다.

츠키미소 1층 관리실 안에는 40년 묵은 삼나무 향과 낡은 다다미 특유의 풀 냄새가 짙게 뒤섞여 있었다. 치즈루는 불단 앞에 홀로 앉아 유스케가 남긴 구리 찻주전자와 요리 노트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불단 곁에는 모서리가 갈라진 낡은 장부 상자가 놓여 있었고, 켜켜이 쌓인 쪽지마다 입주민들이 또박또박 적어 내려간 방세 납부 필적이 담겨 있었다. 배전반 뒤편 벽 깊숙한 곳에서 가늘고 끊임없는 물새는 소리가 스며 나왔고, 35년간 붉은 녹에 갉아먹힌 아연도금 파이프는 속이 텅 비어가고 있었다. 1,860만 엔에 달하는 수리 견적서는 그녀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무거운 바위였다. 입주민들을 버리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나, 구청 직원이 현장 실사를 나오는 순간 철거 명령이 떨어져 곤궁한 청년들이 당장 길거리에 나앉게 되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감당할 길 없는 죄책감과 공포가 녹슨 못처럼 그녀의 가슴을 무언의 자책 속으로 틀어박았다.

8월 22일, 서울의 대형 게임 회사에서 박준호에게 8월 28일로 예정된 정식 화상 면접 초청장을 보내왔다. 설상가상으로 기존 일본 배급사 역시 보수를 깎고 재계약하든지 아니면 다음 달로 계약을 파기하자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그날 저녁 츠키미소에서는 모처럼 조촐한 주말 식사 자리가 열렸고, 케이는 무거운 공기를 누그러뜨리려 고급 사케를 사 왔다. 식사 도중 케이가 준호에게 요즘 어떠냐고 무심코 안부를 묻자, 준호는 잔을 쥔 채 시선을 피하며 “별일 아니에요…… 다음 주에 며칠 출장을 갈지도 몰라요”라고 간신히 얼버무렸다.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은 저마다 훌훌 털고 떠나려는 속내를 공손한 미소 뒤에 감추고 있었다.

당직을 마치고 돌아온 다카하시 케이는 복도 끝에 서서 이 낡은 건물이 소리 없이 미세하게 기울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구급대원으로서 그는 주변 환경에 깃든 잠재적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해내는 감각이 있었다. 뒤뜰로 가 수도 계량기를 살피자, 온 집안이 잠들어 아무도 물을 쓰지 않는 한밤중인데도 바늘이 극도로 느릿하게 돌고 있었다. 벽면 깊숙한 곳에서 전해오는 미세한 진동과 갈수록 절뚝거리는 치즈루의 걸음걸이가 무언의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케이는 오사무처럼 격하게 따져 묻지도 않았고 타이가나 준호처럼 탈출구를 모색하지도 않았다. 그는 개인 사물함에서 비상용 방수포와 다목적 야전삽, 응급 의료 가방을 꺼내 201호 문간에 가지런히 정돈해 두었다. 케이에게 있어 이 집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든, 이곳 사람들의 안전을 지키는 일은 뼛속 깊이 새겨진 본분이었다.

8월 23일 심야 11시, 며칠 동안 짓눌려 지내던 타이가는 방 안에서 약음기를 끼운 채 트롬본을 불었다. 소리 자체는 줄어들었으나 금속 관이 나무 바닥에 일으키는 저주파 진동은 묵직한 쇠망치처럼 아래층 천장을 두드렸다. 막 잠이 들었던 아랫방의 에미가 화들짝 깨어났고, 최근 쌓여온 보험 실적 압박과 딸의 쌀쌀맞은 태도, 집을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겉옷을 걸치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간 에미는 타이가의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 “오가타 군! 지금이 몇 시예요?! 내일 나나 모의고사라구요! 소음이나 만드는 고철 덩어리 만지작거리는 거 말고 남의 인생도 좀 배려해줄 수 없어요?!” 문이 열리자 타이가는 핏기 없는 얼굴로 트롬본을 가슴에 안은 채 서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겨진 아이처럼 떨리는 입술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복도 끝에서 차갑게 지켜보던 오사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으로 들어갔다. 한밤의 소동은 타이가가 방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것으로 끝났다. 어머니 뒤에 서서 발작하듯 화를 내는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나의 가슴속에는 깊은 혐오감과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이튿날 8월 24일 오후, 메이링은 203호에서 전일본공수(ANA) 항공권 예약 웹페이지를 열었다. 그녀는 8월 31일 타이베이 타오위안 공항으로 향하는 편도 항공권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화면 오른쪽 상단의 좌석 유효 보유 시간이 1초씩 줄어들고 있었고, 메이링의 검지는 차갑게 식은 채 마우스 버튼 위에 머물러 있었다. 예약 시간이 모두 소진되어 화면이 만료될 때까지도 그녀는 끝내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으나, 그녀의 영혼은 이미 절반쯤 짐을 꾸려 이 방을 떠나 있었다.

8월 25일 이른 아침, 에미는 나나의 빨랫감을 정리하다가 결국 신발장 깊숙한 곳에 넣어둔 누런 봉투를 꺼내 들었다. 봉투 안에는 시나노 미도리가오카 고등학교의 전액 장학금 지원서가 들어 있었고, 그 위에는 나나의 단정하면서도 단호한 글씨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지원 동기’란에 소녀는 정갈한 필체로 다음과 같이 썼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그 어떤 가족의 기대도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떠나 제 손으로 떳떳하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어둑한 현관에 우두커니 선 에미의 뺨으로 마침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원래 자리에 도로 밀어 넣었고, 딸을 깨우지도 캐묻지도 않았다. 모녀 사이에 진솔하게 소통할 수 있었던 마지막 다리는 이렇듯 묵인된 비밀 속에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8월 하순이 되자 늦여름의 무더위는 한층 더 끈적하게 들러붙었고, 츠키미소의 유서 깊은 목조 골조는 열팽창과 땅밑에서 솟구치는 습기 속에서 가녀린 비명을 토해냈다. 복도 깊은 곳에서는 배관 안쪽의 녹 찌꺼기가 고온에 부식되어 떨어져 나가며 굴절부에 엉겨 붙었고, 수압은 걷잡을 수 없이 치솟고 있었다. 공동 주방 벽면에 번진 물자국은 손톱만 한 얼룩에서 어느새 손바닥만 한 짙은 갈색 흔적으로 번져 있었다. 열 명의 거주자들은 각자 걸어 잠근 문 뒤에서 숨을 죽였고, 온 건물은 절벽 끝에 위태롭게 얹힌 나룻배처럼 보이지 않는 물살을 타고 무너져 내릴 심연을 향해 기우뚱 가라앉고 있었다.

제5장: 단절의 전야

시간의 바늘은 매정하게 8월의 끄트머리를 향해 치달았다. 대기 중에는 태풍이 몰려오기 직전의 눅눅하고 후텁지근한 수증기가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8월 26일, 후지와라 도시락 가게의 중앙 냉장 진열장이 빈사 상태의 짐승처럼 덜컹거리며 굉음을 뿜어냈고, 온도계 바늘은 고집스럽게 영상 10도 이상에 머물렀다. 진열장 가득 상해가는 신선한 식자재를 바라보던 리코는 콤프레셔를 교체하는 데 최소 30만 엔이 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방에서 기침하는 아버지에게는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제과제빵 학원에 등록하려고 2년간 모아둔 적금을 헐어 이를 악물고 냉동설비 회사에 긴급 수리를 요청했다. 그러나 부품을 공수하는 데 사흘이 걸린다고 했다. 그날 밤, 불이 꺼진 도시락 가게에 홀로 앉은 리코는 진열장 받침대 밑으로 녹아내린 얼음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며, 자신이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하수도에 갇혀버렸다는 참담한 기분에 휩싸였다.

8월 27일 오후, 타이가는 삿포로 청년 아카데미의 정식 계약서 초안을 들고 준호의 방문을 두드렸다. 안경을 고쳐 쓴 준호는 계약 조항을 한 줄씩 꼼꼼히 살폈다. ‘삿포로 장기 상주’ 조항에 이르자 고개를 들어 타이가를 바라보았다. “타이가, 정말 훌륭하고 반듯한 계약이야. 하지만 이건…… 네가 9월 상순에 홋카이도로 이주해야 한다는 뜻이잖니.” 타이가는 붉어진 눈시울로 무릎을 꼭 움켜쥐었다. “준호 형,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떠나면 오사무 아저씨는 젊은것들이 하나같이 무책임하다고 욕할 테고, 치즈루 아주머니는 저한테 참 잘해주셨는데 이런 시기에 떠나다니……” 6년 전 처음 도쿄에 발을 디뎠을 때 자신만큼이나 방황하던 청년을 바라보며 준호의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그는 손을 뻗어 타이가의 어깨를 토닥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나아가야만 하는 순간이 있단다, 타이가. 여기에 남아있는다고 해서 그 누구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아.”

8월 28일, 준호는 단정한 정장을 갖춰 입고 방 안에서 노트북 카메라를 마주하며 2시간에 걸친 한국어 면접을 치렀다. 서울 측이 제시한 조건은 매력적이었지만 까다로웠다. 입사일은 9월 15일이었고, 합격을 수락할 경우 다음 주 내로 서울에 도착해 서류 절차를 밟아야 했다. 화상 통화가 끝나자 준호는 컴퓨터를 끄고 다다미 위로 털썩 쓰러졌다.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내리쬔 햇볕에 탈색된 츠키미소의 회록색 외벽을 바라보는 그의 가슴속에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북받쳤다. 비좁지만 자신의 온갖 열등감과 실패를 묵묵히 품어주었던 이 오래된 집을 사랑했으나,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의 물결 앞에서 그는 이미 서른이었고 더 이상 이 집과 함께 가라앉을 여유가 없었다.

8월 29일 오후, 장대비가 세차게 쏟아져 내렸다. 열여섯 살 사에키 나나는 비옷을 입은 채 조후역 앞 벤치 곁에 서서 책가방에서 빗물에 젖은 시나노 미도리가오카 고등학교 입학설명회 안내장을 꺼냈다. 날짜와 연락처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소녀의 뇌리에는 어머니의 깊은 한숨과 단체방에서 몰아세우던 오사무 아저씨의 힐난, 그리고 꾸중을 들을 때 타이가가 짓던 굴욕적인 눈빛이 맴돌았다. “여기 남아봤자 결국 또 다른 치즈루 아주머니나 엄마처럼 살게 될 뿐이야.” 나나는 안내장을 구겨 쥐어 쓰레기통에 내던진 뒤, 휴대폰을 꺼내 공식 라인 계정을 【차단 및 삭제】했다.

바로 그 순간, 편의점에서 캔 블랙커피를 사 들고 나오던 다카하시 케이가 차양 아래에서 나나의 결연한 몸짓을 목격했다. 케이는 소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과 분노를 보았으나 발걸음을 멈추었다. “케이, 모든 일에 다 끼어들려고 하지 마라. 어떤 아픔은 혼자서 걸어가야만 하는 법이다.” 아버지의 당부가 귓가에 맴돌았다. 케이는 차가운 커피 캔을 손에 쥔 채 침묵을 택하며 빗속으로 돌아섰다. 나나는 뒤돌아 멀어지는 케이의 뒷모습을 보았고, 그 순간 어른들을 향해 품고 있던 ‘누군가는 내 마음을 알아줄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한 줄기 기대마저 가슴속에서 완전히 꺼져버렸다.

8월 30일 해질녘, 거센 폭풍우가 잠시 잦아들었으나 대기는 숨이 막힐 만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주간 근무를 마치고 츠키미소로 돌아온 케이는 1층에서 2층으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 모퉁이에 발을 딛자마자 관리실 문 너머에서 고통에 찬 거친 숨소리를 들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는 반쯤 열린 미닫이문을 서둘러 밀어젖혔다. 예순여덟 살의 키무라 치즈루가 다다미 위에 주저앉아 오른 다리를 뻗은 채 두 손으로 허벅지를 부여잡고 있었고, 잿빛으로 변한 얼굴에는 굵은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방바닥에는 흩어진 진통제 알약과 엎질러진 미지근한 물잔이 뒹굴고 있었다.

“치즈루 아주머니!” 구급대원의 본능에 이끌린 케이는 즉시 한쪽 무릎을 꿇고 노인의 경동맥에 손을 얹으며 다른 한 손으로 등을 단단히 받쳤다. “맥박 110회, 호흡이 가쁩니다…… 어디가 아프세요? 가슴인가요? 심장인가요? 지금 당장 구급차를 부르겠습니다!”

“안 돼……! 구급차는 절대로 부르면 안 돼!” 치즈루는 온 힘을 쥐어짜 케이의 손목을 움켜쥐었고, 굳은 손톱이 살갗에 깊숙이 파고들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케이…… 제발 부탁이야…… 아주머니 소원이야! 구급차가 붉은 경광등을 켜고 골목에 들어오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게 될 거야…… 입주민들이 겁을 먹을 테고…… 오사무도 내가 더 이상 못 버틴다는 걸 눈치챌 거야…… 그러면 이 집을 지킬 수 없게 돼……”

케이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충혈된 채 애원하듯 바라보는 치즈루의 혼탁한 눈동자를 마주하자 가슴을 커다란 바윗덩이가 짓누르는 듯했다. “치즈루 아주머니, 이건 장난이 아닙니다. 무릎 관절에 급성 화농성 감염이 도졌거나 전신 반응까지 번졌을 가능성이 높아요……”

“약은 먹었단다…… 조금만 쉬면 괜찮아져…… 정말이야……” 치즈루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벽에 몸을 기댄 채 힘겹게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케이, 넌 참 착한 아이지. 난 괜찮아, 자 봐라, 이렇게 움직일 수 있잖니……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말아 다오. 아주머니랑 약속해줄래?” 케이의 팔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쪽에는 응급구조사로서의 직업 윤리가, 다른 한쪽에는 5년 동안 자신을 돌봐준 노부인이 자존심을 걸고 건네는 애절한 간청이 놓여 있었다. 결국 케이는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치즈루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네고 흩어진 약을 주워 담으며 낮게 속삭였다. “……알겠습니다. 오늘 밤은 부르지 않을게요. 하지만 내일 아침에는 제가 직접 모시고 종합병원 정형외과에 가야 합니다.” 치즈루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관리실을 나서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이 다정한 양보가 훗날 가슴을 짓누르는 씻을 수 없는 멍에가 되리라는 것을. 내일이라는 운명은 그들에게 병원에 갈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8월 31일. 도쿄는 태풍 상륙 직전의 기괴한 적막에 휩싸였고, 하늘은 불길한 납빛 보라색으로 물들었으며, 공기는 쥐어짜면 물이 흘러내릴 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오전 10시, 노구치 오사무는 미쓰바 부동산 개발 조후 지사의 문을 직접 열고 들어섰다. 베테랑 택시 기사 특유의 인맥과 노련한 유도신문을 발휘한 끝에, 그는 젊은 영업 사원의 입에서 등골이 서늘해지는 진실을 캐냈다. “아, 츠키미소 말씀이신가요? 맞습니다, 키무라 치즈루 씨가 의뢰하신 감정 평가서는 이미 지난달에 나왔어요. 보수 비용이 너무 막대해서 보존할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결론이 났죠. 저희 기획부에서 통합 개발안을 이미 올렸고, 늦어도 내일 9월 1일에는 담당자가 직접 키무라 씨를 찾아가 건물 일괄 매입 계약서를 전달할 예정입니다. 어르신, 혹시 거기 사시는 세입자분이신가요? 9월이 지나면 명도 절차가 시작될 테니 하루라도 빨리 새집을 알아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부동산 건물을 나선 오사무는 햇살이 가시고 불어 닥치는 돌풍 속에 서서 온몸이 얼어붙는 충격을 받았다. 40년에 걸친 추억, 아내와의 사별, 늦은 밤 귀가할 때마다 치즈루가 현관에 켜두던 따스한 주황빛 등불, 그리고 유스케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던 “오사무, 여긴 언제까지나 자네의 집일세”라는 한마디……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파렴치한 거짓과 배신으로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오후 3시, 오사무는 낯빛이 흑빛이 되어 츠키미소로 돌아왔다. 1층 대문을 열었을 때, 그는 치즈루가 공용 거실의 긴 나무 탁자 앞에 고요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노부인의 앞에는 두 종류의 서류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하나는 시공사의 1,860만 엔짜리 보수 공사 견적서였고, 다른 하나는 붓으로 직접 정갈하게 써 내려가 아직 먹물이 마르지 않은 입주민 통지문인 《츠키미소 임대차 계약 1년 후 종료 예정 안내문》이었다. 거실 문간에 선 오사무는 흰 종이에 씌어 있는 검은 글씨의 표지를 바라보며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발소리를 들은 치즈루가 고개를 들어 오사무를 쳐다보았다. 움푹 파인 노인의 눈매는 고인 물처럼 처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오사무를 응시했고, 그 눈빛 속에는 슬픔과 후련함, 그리고 가혹할 만큼 단호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오사무 역시 묻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쇠붙이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쾅’ 소리와 함께 문을 닫아걸었다.

바로 이 순간, 2층의 타이가는 악보를 한 장씩 가죽 트렁크에 정리해 넣고 있었고, 준호는 모니터 앞에 앉아 서울에서 날아온 전자 계약서를 들여다보고 있었으며, 메이링은 창밖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마침내 항공권 구매 확인 버튼을 눌렀다. 에미와 나나는 방 안에서 영원히 뜯어보지 못할 입학 요강을 사이에 둔 채 서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고, 다카하시 케이는 구급대 대기실에서 내일 출동에 쓸 외상 응급 가방을 점검하고 있었다. 츠키미소 전체를 둘러싼 열 가닥의 운명의 실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팽팽하게 옥죄어 들고 있었다.

종장: 폭우의 조짐과 현관의 새 발소리

9월 1일, 이른 아침 6시 15분.

태풍의 외곽 순환기류가 마침내 도쿄 서부 외곽을 강타했다. 억수 같은 폭우가 쏟아졌고, 사나운 돌풍은 만 마리의 말이 내닫는 듯한 굉음을 토해내며 츠키미소 지붕의 함석 골판을 거세게 쥐어뜯었다. 뒷마당에 아무렇게나 무성하게 자라난 몇 떨기의 달맞이꽃과 야생 박하는 거센 비바람에 진흙탕 속으로 짓눌리며 쌉싸름한 풀물과 젖은 흙냄새가 뒤섞인 짙은 향을 뿜어냈다. 녹슬어 구멍 난 양철 홈통을 타고 내달린 빗물은 처마 밑으로 쏟아져 하얗게 부서지는 물보라를 일으켰다. 어스레한 새벽빛 아래, 조후 언덕길로 이어지는 진흙투성이 길목에 가냘프면서도 꼿꼿한 실루엣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물 장정가인 스물아홉 살 미즈노 소라는 물이 빠져 희끗해진 짙은 회색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오른손으로는 묵직한 수제 가죽 트렁크를 끌며, 왼손으로는 방수 캔버스 천으로 단단히 감싼 길쭉한 나무 상자를 조심스레 품에 안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그녀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도구들이 들어 있었다. 대대로 물려받은 뼈 폴더 몇 자루와 19세기 금박 활자 동판 세트, 아껴둔 에치젠 화지 수십 장, 그리고 손제본용 정밀 타공 송곳 세 자루였다. 소라에게 있어 서적 장정이란 단순한 겉치레가 아니라 부서진 기억을 치유하는 의식이었다. 세월의 풍파에 닳고 바랜 종이라도 면실과 식물성 풀로 정성껏 꿰매면 새로운 표지 아래에서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삶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 역시 그러했다. 비록 온통 상처투성이일지라도 뼈대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면, 두 손으로 한 땀 한 땀 매만져 다시 일으켜 세울 가치가 있었다.

불과 사흘 전, 그녀는 요코하마에서 전 연인과 4년 동안 동거했던 아파트를 깨끗이 비웠다. 세월의 풍파를 거뜬히 견뎌낼 줄 알았던 관계는, 자신의 작업을 ‘돈도 안 되는 손장난’이라며 깎아내리던 상대의 폭언 속에 한 줌 가루가 되어 부서져 버렸다. 소라는 울며불며 매달리지도 재산 분할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떠나기 전 방을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하게 청소했고, 전 연인이 부쳐온 열쇠를 서랍 속에 가만히 넣어 잠근 뒤 가방을 둘러메고 도쿄행 열차에 올랐다. 그녀가 츠키미소를 택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40년 된 낡은 목조 주택이라 입주민들 모두 제 살기에 바빠 서로의 과거를 캐묻지 않으며, 가끔 들어오는 책 수리 일감만으로도 근근이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방세가 저렴하다는 부동산 중개인의 말 때문이었다. ‘그 누구와도 과거를 나눌 필요가 없는 곳.’ 소라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빗줄기는 갈수록 사나워졌고 거센 바람은 빗방울을 몰아쳐 트렌치코트의 옷자락을 차갑고 무겁게 적셨다. 미즈노 소라는 웅덩이에 고인 물을 밟으며 츠키미소의 낡은 나무 계단을 올라, 색바랜 ‘키무라’ 문패가 걸린 현관문 앞에 섰다. 문밖은 포효하는 비바람이었고, 문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윽한 어둠이었다. 처마 밑에 매달린 낡은 황동 풍경은 폭풍 속에 미친 듯이 부딪치며 날카롭고 맑은 쇳소리를 뿜어냈고, 마치 4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이 오래된 집에 마지막 경종을 울리는 듯했다.

문안 1층 복도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방 안에 홀로 앉은 노구치 오사무는 택시 열쇠를 손가락 끝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차가운 눈빛으로 굳게 닫힌 문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치즈루는 공용 거실의 긴 탁자 앞에 앉아 모두의 운명을 결정지을 통지서를 두 손으로 짓누른 채 밖에서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를 들으며 입주민들을 향한 말 못 할 미안함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2층의 타이가, 준호, 메이링, 에미, 나나 역시 각자 걸어 잠근 방문 뒤에서 숨을 죽인 채 폭풍의 절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만의 작은 울타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으나, 온 집안 사람들의 운명이 이미 어둠 속에서 떼려야 뗄 수 없이 얽혀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바로 그때, 골목 어귀에서 물웅덩이를 가르며 달려오는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구급대에서 막 야간 당직을 인수인계하고 방풍 재킷조차 벗지 못한 다카하시 케이가 오토바이를 몰고 츠키미소 마당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물방울이 맺힌 헬멧을 벗고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훔쳐낸 그의 시선은 현관 앞에 서 있는 낯선 여인에게 가닿았다. 케이는 소라의 품에 안긴 묵직하고 전문적인 나무 상자를 보았고, 사나운 폭우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그녀의 차분한 눈빛을 읽어냈다. 이 폭풍우 치는 아침에 당도한 여인에게는 쇠락해가는 이 낡은 집과는 전혀 다른 강인한 결기가 깃들어 있음을 구급대원의 직감이 알려주고 있었다.

대기 속에는 짙은 오존과 눅눅한 목재, 오래된 쇠녹 냄새가 뒤섞여 진동했다. 1층 공동 주방의 흰 타일로 마감된 내력벽 깊은 곳에서, 지하수 유입과 35년간의 부식으로 속이 텅 비어버린 아연도금 본관 파이프가 폭우 역류로 치솟은 막대한 수압을 이기지 못하고 굴절부의 취약한 금속 조직을 비틀며 부서지는 소리를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딱.’ 지극히 희미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파열음과 함께 균열이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미즈노 소라는 시선을 들어 눈앞의 얼룩진 나무문을 바라보며 흙먼지와 녹내가 밴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녀는 오랫동안 종이를 매만져온 희고 결 고운 손가락을 뻗어 츠키미소의 문을 가만히 두드렸다. “똑, 똑, 똑.” 맑고도 다부진 노크 소리가 거센 비바람을 뚫고 어둑한 복도 안으로 스며들었다. 바로 그 순간, 주방 벽 깊숙한 곳에서 고압 수류가 터져 나오는 첫 번째 둔탁한 파열음이 울렸다. 폭풍의 서막이 이렇듯 요란하게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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